대공황을 촉진한 중요한 요인 중 1928~1929년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Fed)의 급격한 금리인상(3.5% → 6%)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늘은 당시 미국이 ‘금리인상’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1920년대 금리 정책: 금리인상 → 금리인하 → 금리인상
대공황이 발생한 게 1929년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Feb는 이 시기 직전에 금리를 3.5% 에서 6% 급격한 인상을 단행하는데요. 이 때문에 1929년 10월 24일의 주가 폭락과 함께 자유 시장 경제 체제가 무너지며 약 10년간 거대한 불황을 겪게 됩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왜 금리를 급격히 올릴 수 밖에 없었을까요 ?
자료를 찾아보면, 1920년대 금리 정책은 이해가 잘 안될 정도로 변화가 많던 시기 입니다.
금리도 살펴보면, 1920년에는 금리를 올렸다가, 1922년 부터는 금리를 다시 낮추고, 1928년 부터 다시 금리를 올린 것으로 나오죠.
- 1920~1921년: 전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7%까지 인상
- 1922~1927년: 경기 회복을 위해 금리를 점진적으로 3.5%까지 인하
- 1928~1929년: 자산 시장 과열과 주식 시장 투기 붐을 막기 위해 6%까지 인상
7%까지 인상했다가 3.5%까지 내렸다가, 다시 6%까지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제대로 탔네요. 오늘은 그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92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금리인상
1차 세계대전(1914~1918) 동안 미국 경제는 전시 특수로 인해 급격한 팽창을 겪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했고, 중앙은행은 이를 지원하며 시중에 돈을 풀었습니다.
이 시기 군수 물자 생산하던 기업들이 크게 성장하였죠.
전쟁이 끝난 후, 막대한 군수 물자 생산이 줄어들었지만, 전쟁 기간 동안 풀린 통화량(돈)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심각해졌습니다.
1919~1920년 소비재와 원자재 가격이 폭등 했으며,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20%가 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신용 대출과 투기도 급증하여, 일부 산업과 주식 시장에서 자산 거품(버블)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연준에서는 경제침체도 문제였지만 인플레이션을 먼저 잡기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합니다.
금본위제도 한몫 했는데요.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경제가 불안정해지면서, 미국으로 금이 대량 유입되었어요.
금본위제 하에서는 과도한 금 유입이 발생하면 통화량 증가하고, 이는 다시 인플레이션 심화를 촉진하기 때문에, 금리인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죠.
하지만, 이 금리인상 때문에 미국에는 심각한 경기 침체가 도래하게 됩니다.
1922~1927년: 경기 회복을 위한 점진적 금리인하
1920년대 초반, 미국 경제는 생산 감소, 기업 도산, 실업률 증가(실업률 11% 이상) 로 이어지는 심각한 경기 침체 시기를 겪게 됩니다.
당시는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 침체 시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여서, 일단 인플레이션부터 잡고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결국 심각한 경기 침체와 높은 금리로 인해 기업들은 투자를 줄였고, 소비자들도 대출을 줄이자 이를 막기 위해 금리를 다시 낮추게 됩니다.
미국 연준은 금리를 1922년부터 낮추기 시작해서, 1928년까지는 3.5% 대까지 낮추게 되는데요.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저금리를 유지하자, 미국 경제는 다시 급속도로 성장을 하게 되고, 미국은 광란의 20년대 시기로 들어 서게 됩니다.
미국 경제의 고속 성장 시기: “광란의 20년(Roaring Twenties)” (1920~1929년)
금리 인하는 기업의 투자 확대, 소비자의 소비 증가, 금융 산업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이 시기 미국 경제는 연평균 4~5% 성장률을 기록하며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미국 GDP(국내총생산)는 1920년 687억 달러 → 1929년 977억 달러로 약 40% 증가 하며, 금리 인하에 대한 수혜를 단단히 받게 되죠.
특히, 자동차, 전기, 금융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소비재 중심의 경제 구조가 정착이 됩니다. 이 시기를 경제광란의 20년 이라고 부릅니다.
- 자동차: 헨리 포드(Henry Ford)의 포드 모델 T(자동차) 대량 생산으로 인해 자동차 보급이 급격히 증가
1920년 미국 가구의 약 26% → 1929년 50% 이상이 자동차를 소유 - 전기: 전기 보급 확대로 인해 냉장고, 세탁기, 라디오, 전등 등의 가전제품이 보급
공장의 기계화와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됨 - 금융: 분할 상환 방식(할부제도) 가 등장하면서 자동차, 가전제품 등 소비재 구매가 폭발적으로 증가
은행 대출과 신용 거래 확대로 인해 일반 대중이 쉽게 돈을 빌려 소비와 투자 가능
기업 실적이 개선되면서 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 주식 투자가 확대됨
레버리지로 주식을 사는 이용한 마진 트레이딩이 유행하며, 주식 시장이 과열됨
이 시기 너무 오랫동안 저금리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대공황의 충격이 크게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는 연준의 실기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신속한 금리 인하(7% → 3.5%)를 하지 못한 이유
연준이 걱정 한건 인플레이션이 다시 오면 어쩌나 였습니다.
1919~1920년 미국은 20% 이상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했고, 전후 경제 불안정성이 심화되었었기 때문에, 연준은 금리를 너무 빠르게 낮출 경우 다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습니다.
금본위제 균형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미국이 급격히 금리를 낮추면, 미국에서 유럽(특히 영국)으로 자본 유출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연준은 금본위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금리 조정을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28~1929년: 급격한 금리인상
자산 시장이 극도로 과열됩니다.
다우 존스 산업 평균 지수(DJIA)는 1920년 1월 약 108포인트에서 1929년 9월 약 381포인트로 상승하여, 약 9년간 250%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주식 거래량도 폭증하고, 시장 참여자도 늘어났으며, 자기 자본의 10%만으로 주식을 매수하는 과도한 레버리지를 초래하였습니다.
‘1928~1929년 금리인상’은 투기 과열, 신용 과잉, 인플레이션, 금본위제 문제 등을 해결하려는 합리적인 조치였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문제는 너무나 급격하게 인상을 하는 바람에, 경제가 신용경색이 되며, 결국 주식 시장 붕괴가 된 거죠. 금리 인상이 그 결정적 촉매제 였습니다. (미국 연준 History – 주식시장 붕괴)
1920년대 연준 의장은 누구였을까 ?
대체 누가 연준 의장이였길래,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정책을 폈던 걸까요 ?
당시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1914~1928) 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로, 사실상 당시 연준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초반 금리를 인하한 주요 인물로, 1927년 금리를 낮춰 영국 파운드화를 지원하고 미국 경제를 부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1928년 건강 악화로 사망, 이후 연준은 통화 정책의 중심을 잃고 금리 급등 정책(긴축 정책)을 시행하여 대공황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스트롱 사망 후, 로이 A. 영 (Roy A. Young, 1927~1930)이 연준 의장이 1928~1929년 연준의 금리 급등 정책(긴축 정책)으로 신용 경색을 초래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세계 1차 대전 이후 부터, 대공황 직전까지 미국은 2명의 대통령을 거치게 되요.
워런 G. 하딩 (Warren G. Harding, 1921~1923) 대통령은 192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당선 된 대통령입니다.
‘정상으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를 내세우며 정부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적 경제 정책을 추진 하죠. 안타깝게도 1923년 임기 중 심장마비로 사망 합니다.
캘빈 쿨리지 (Calvin Coolidge, 1923~1929) 대통령은 하딩 사망 후 부통령이었던 쿨리지가 대통령직 승계한 대통령 입니다.
작은 정부, 감세, 자유시장 경제 정책을 유지하며 ‘광란의 20년(Roaring Twenties)’의 경제 성장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당시 미국은 전후 경제 안정을 위해, ‘자유시장 경제’를 외치는 행정부와, 금리 인하를 통한 경제 부양을 하려던 스트롱 연준 의장을 통해 대공황 직전까지 경제 상황을 끌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대공황 직전 ‘금리인상’이 없었다면, 대공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 ?
금리인상이 대공황을 촉진한 것은 맞지만, 그 이전부터 미국 경제에는 이미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과잉 생산 (Overproduction)
1920년대 동안 기업들은 대량 생산을 통해 높은 이익을 기록했지만, 소비 수요 증가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즉 과잉생산 상태였죠.
특히 농업 부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고, 농부들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며 생산을 줄이고, 실업이 증가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임금 정체 & 부의 불평등
기업의 생산성은 증가했지만, 임금은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상위 계층의 부가 증가하면서 투자와 소비가 특정 계층에 집중되었고, 대다수 노동자들은 구매력이 부족하여 경제 성장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죠.
금본위제(Gold Standard) 문제
미국이 금본위제 를 유지하면서 긴축적인 통화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경기 침체 시 유동성을 늘릴 수 있는 정책 대응이 어려웠던 점도 있습니다.
주식시장 버블과 레버리지 투자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신용 거래(마진 트레이딩)가 급증하면서 주식시장이 과열되었고, 1929년 거품이 터지면서 금융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즉, 금리인상 전부터 주식시장과 부동산 거품이 형성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금리 인상이 없었더라도 미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이 누적되면서 경제 위기는 피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28~1929년 급격한 금리 인상을 하지 않았다면, 대공황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지연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 까지 입니다. 다음에 또 다른 컨텐츠로 뵈요.